(파왜관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울분과 고뇌 속에서 신해년을 보내던 황제는 그해 시월 쓸쓸한 늦가을의 들길을 거닐다가 홀연히 깨달았다. 그가 고통스레 가지고 있는 그 어둠이야말로 훗날의 영광을 몇 배나 더 찬란하게 만들어 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바탕임을, 어둠이 없으면 빛도 없고 시련이 없으면 영광도 없음을. 그러자 그를 병들게 한 마음의 상처는 하늘의 뜻에 대한 배전의 확신으로 변하여 황제를 힘차게 일으켜 세웠다.
황제를 위하여 1 (민음사) - 107p
(파왜관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양이의 문물을 익히러 출가하기 위해 부친인 정 처사를 설득하며 황제가)
성현의 말씀에 지난 일은 허물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으되, 그래도 한 가지 거울로는 삼을 수 있으니, 이는 당태종이 이른바 옛것을 거울로 삼아 앞날의 성쇠를 알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비록 저 파왜관의 일전은 참담하게 끝났지만 돌이켜보면 천하의 세가 반드시 의로움에 따르지 않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송의 양공이 홍수가에 뼈를 묻은 것이나 인의를 배운 서융이 표한한 초에게 멸망당한 것은 바로 그런 연유입니다.
저는 이번 파왜관의 전투를 통해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의보다 영악스러움이며, 인화보다도 날카로운 병기가 낫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황제를 위하여 1 (민음사)- 108p
(고향을 그리워하고 처지를 비관하는 황제에게 척 소저가)
흥하고 쇠하는 것은 아침과 저녁의 바뀜과 같고 세상의 일은 부평초 같으니 너무 상심 마십시오.
황제를 위하여 1 (민음사) - 223p
일제 강점기에 쇠퇴한 이씨 명맥을 이어받아 조선의 천하를 꿈꾸는 정씨 황제의 모험. 그의 고고하고 청아한 정신세계와 대의만 앞서 어설프고 우스꽝스러운 행보가 교묘하게 균형을 이루며 제시된다. 명맥이 끊긴 치욕의 역사로 손상된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문학일까. 아니면 '동양판 돈 키호테' 같은 캐릭터인 황제를 내세워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세력들을 교묘하게 조롱하는 것일까.
등장인물의 대화에서 고시나 고문헌이 자주 인용되어 쏠쏠히 읽는 맛이 있다. 조상들은 실제로 저렇게 말했나 아니면 역사적 기록인가 모르겠는데 인용만으로 티카티카 오가는 대화 보는 맛이 있음. 삼국지나 초한지 등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익숙한 이름과 사례를 발견하며 더 재미있게 느낄 것이다. 분량이 많지 않은 책을 굳이 왜 1,2권으로 분할해 놓았나 보니까, 현대의 필자가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의 컨셉을 충실히 취하기 때문임을 뒤에 가서 알게 되었다. 단어가 까다로워도 책장이 부드럽게 잘 넘어간다. 매우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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